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의 역사적 배경
임오의리壬午義理와 영남만인소 : 정조 16년 이우만인소와 철종 6년 이휘병만인소
만인소의 원인이 된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였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11)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영조는 정치가로서는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군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강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천인출신의 어머니,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등은 영조의 성격을 조급하고 민첩한 외골수로 만들었다. 그에 반해 사도세자는 말수가 적고 느린 편이었으며, 영조는 이러한 세자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 25년(1749)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당론의 처리를 둘러싸고 영조로부터 격노를 사기도 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세자는 몇 차례에 걸쳐 반발하면서 비행을 저질렀다. 결국 1762년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뒤주에서 아사餓死하는 참극을 겪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히 그의 비행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경언이 올린 고변은 모두 10여조에 달하는 것이지만 알려져 있는 것은 5, 6가지 정도이다. ① 여러 사람을 죽였다는 점 ②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점 ③ 시전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점 ④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北城出遊〕 ⑤ 평안도로 여행을 갔다는 것〔西北行役〕 등이다. 이러한 세자의 비행은 질책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세자를 처형할 만큼 큰 죄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조는 신하들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세손인 정조의 애원을 뒤로 하고 뒤주를 들이게 하여 세자를 죽였던 것이다. 사실 관계 자료가 모두 소각되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구태여 추측하자면 평안도로의 여행을 들 수 있다. 평안도는 조선의 국경으로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세금은 중앙으로 납부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평안도관찰사는 정휘량으로 소론계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는 세자의 평안도 여행이 영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의 준비였기 때문에 영조는 이를 숨기기 위하여 세자의 개인적인 비리로 희석시킨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세자가 죽고 난 다음 영조는 곧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직접 시호를 사도思悼라고 지었으며, 세손으로부터는 이 문제를 다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와 뒤주를 들였던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으로 남는 사안이었다. 당시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영남남인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안동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아들 응원應元을 시켜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부자가 같이 처형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정조 16년 영남만인소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영소전말(嶺疏顚末)
영남 최초의 만인소인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전말을 기록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