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의 역사적 배경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조선 정부의 복제개혁에 반대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조선 정부는 개화를 명분으로 1884년 윤5월(음력, 이하 같음) 좁은 소매의 옷을 강제로 입도록 하는 복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신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부의 조치를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하였고,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 이 만인소이다. 현재 실물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만인소 중 하나이다.
이 만인소는 1884년(고종 21) 10월에 작성되었다. 총 8,849명이 서명하였고, 소두疏頭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내곡內谷 이재교李在嶠(1822∼1890)이다. 경주의 유생이 주도하고 회재의 후손이 소두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원본은 경주의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그 크기도 방대하여 세로 102㎝, 가로는 자그마치 10,036㎝에 달한다. 만인소에 참여한 인원이나 크기를 감안할 때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소가 완성된 시기에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복제 개혁 자체가 취소되어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다.
실제 올라가지 않은 상소이지만, 이 상소에는 여러 가지 정보들이 담겨있다. 조선말 이른바 시대적 전환기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과 그 대응이 들어있다.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개화’를 향해 달려가는 조선의 현실을 막아보고자 하는 조선의 전통적 지식인들의 노력이 체화된 것이다. 이 만인소에는 크게 세 가지의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는 조선의 ‘공론정치’전통이다. 두 번째는 ‘위정척사사상’이다. 마지막은 이 상소의 계기가 되었던 ‘복제개혁’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 복식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복제개혁”은 단순히 평상복을 서양식으로 바꾸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자부심마저 포기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때문에 전통적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884년 윤 5월에 처음 시도하였던 복제개혁은 정부 대신을 비롯한 관료와 유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거기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개혁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복제개혁과 함께 단발령까지 단행되면서, 그에 대한 저항은 극에 달해 의병항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