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복제개혁 반대
⊙ 조선의 공론정치(公論政治)와 만인소(萬人疏)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병이 나서 아프면 부모에게 호소하고 궁지에 몰려 곤경에 처하면 천지에 하소연하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부모이자 천지입니다. 저희들은 아프거나 곤경에 처한 것보다 심합니다. … 천지와 부모께 한 마디 경계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보면, 관료가 아닌 평범한 유생이라도 국가 정책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게다가 만 명의 이름으로 상소한 만인소에 대해서는 아무리 독재 군주라고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적절한 응답이나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는 조선 사회 특유의 공론정치(公論政治)에서 기인한 것이다. 때문에 이 상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조선의 공론정치 전통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 ‘위정척사사상’과 복제개혁 반대
우리나라는 바다 한 쪽 구석의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풍속은 고상하면서도 돈독하고 순박합니다.
… 여름에는 거친 베옷을 입고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으면서도 시장에서 파는 수놓은 비싼 옷을 원하지 않았으며, 헌 솜으로 만든 도포에 새 솜을 끼워 넣으면서도 몸에다 화려한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 외국의 가볍고 따뜻한 옷도 가까이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이역(異域)의 비단으로 만든 물건도 사람들에게 팔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든 습속이 그처럼 고상하였습니다
위의 자료를 보면 우선 조선의 풍속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부심을 근거로 실용적이거나 화려한 외국의 의복을 입으려고도, 판매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외국 상품이 조선에 범람하지 않도록 막음으로써 조선의 고상한 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인식도 보이고 있다.
⊙ “복제개혁”과 만인소
옛날의 성인들이 예법(禮法)을 정할 때 의상도 포함을 시켰고, 의복의 색깔을 정해 귀하고 천함을 구분하도록 했습니다. 조정의 제사 때나 혼인, 초상과 같을 때 입을 옷, 공적이나 사적인 일로 출입할 때의 복장도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의 모양이 있도록 하되 길고 짧은 것은 몸에 맞추도록 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규범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례』에는 예법에 어긋나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실려 있고, 『예기』에도 의복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의복 제도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규범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884년(고종 21) 윤5월 정부에서 복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는 전면적인 복제 개혁을 시도하지 않고 사복에 한정된 제한된 조치였다.
“조복(朝服)·제복(祭服)·상례복(喪禮服)은 선성(先聖)의 유제(遺制)이므로 고칠 수 없지만, 사복(私服)은 시대에 따라 적절히 변경할 수 있다. 따라서 당상관은 홍단령(紅團領)을 입지 말고 간편한 흑단령(黑團領)을 입도록 할 것”이 그 골자(骨子)이다. 같은 해 6월 예조에서는 그 시행 세칙이라 할 수 있는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을 발표하여 일반인들에게 ‘착수의(窄袖衣)’, 즉 소매가 좁은 옷을 입도록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