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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 형성과정

통문(通文)
통문은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16세기부터 서원건립, 상소 등을 위하여 발행되었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통문·격문의 형태로 광범하게 이용되었다. 조선후기 들면서 통문은 주로 상소를 올리기 위한 준비단계로 사용되거나, 자신들의 입론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右文通諭事(내용)
右文通 (개인) (연월일)
서원 齋任 연명

右文爲通諭事伏以天道孔昭日月無私樊庵蔡先生伸理之命遽下於覆盆之中感祝攢抃之
情豈但爲樊庵地哉爲世道幸也爲吾黨賀也第伏念樊庵遺文已經 先朝御定一言一句一咳一唾皆從
金枰上稱來而又况 御製一篇編之首卷則今日臣子所以體 先王之遺意刊先生之遺集豈或有小忽
之意哉此不可無齊會爛商之道玆以七月二十五日定道會于榮川伊山書院 僉須趁期來臨以爲合
席敦定之地幸甚

  • 右通文
  • 癸未五月初八日三溪書院
  • 都有司金凞昇 洪庭學 鄭象琦
    齊有司權載轅 鄭先說 邊宅中
    金建銖 金在鼎 具有經
    會員權思浹 金凞復 余鍾仁
    (이하 생략)

通文實例_豊山柳氏 和敬堂 통문 091

回文
右文爲回諭事今十五日 恩行入府時以虎溪書
院請査事儒生當爲後送而不可無齊會爛商
本院堂會以今十二日定于洛皐書堂奉告伏願
僉尊濟濟來臨幸甚
戊寅九月初十日 屛山書院都有司柳

齋有司柳

回文實例_豊山柳氏 和敬堂 통문 011

이러한 통문은 여론을 결집시키기 위한 초기 발의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통문을 받으면 통문을 받은 서원·향교나 개인은 통문에 대한 답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받은 통문에 참여 여부를 기록하여 돌려주거나 따로 答通을 작성하여 발행처에 송부하였다.

이렇게 하여 道會 또는 鄕會가 개최되면 그 會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약 상소가 필요하면 상소를 위한 疏會를 설치하게 된다. 소회는 일반적으로 서원·향교에 설치되었으며, 소회를 위한 유사를 임명하고 會疏儒生을 선발하여 소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상소(上疏)
고려시대부터 관료들에 의해 국왕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용되었으며, 성종대 이후 본격적으로 관료가 아닌 일반유생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姓名) 上疏 臣矣身等 云云(내용)
臣無任屛營祈懇之至謹昧死以

年號某年某月某日

상소문이 채택되면 거기에 소임의 명단을 적고 疏櫃에 보관하게 되는데 명첩은 각지의 拜疏儒生들이 서명을 받아 갖고 온 것들을 계속 수합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연명은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필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명첩의 필체가 동일한지의 여부가 조작 또는 사주혐의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명과정에서 사전에 인원수를 군현 등 행정구역별로 배당하는 예도 있었다.

소청에서 소본의 채택 등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면 拜疏를 위해 상경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농번기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배소할 때에는 각지의 배소유들이 소청에 모여 동시에 출발하기보다는 중도에서 합류하거나 소재지에서 바로 상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비는 소청에서 자발적인 부조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강제로 할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경하게 되면 상소는 승정원에 봉입하여 왕에게 올리게 되는데 당쟁이 격화된 이후 승정원에서 반대당파의 유소를 봉쇄하기 위하여 승정원에서 봉입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영조 이후 유소는 성균관의 謹悉을 얻어 승정원에 봉입되게 되는데, 간혹 성균관에서 謹悉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한 경우 같은 당의 관료들을 통하여 유소가 올라왔음에도 봉입되지 못하고 있다고 상소하여 왕에게 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소는 왕이 열람을 하고 비답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유소의 경우 왕은 소두를 불러 직접 下問하기도 하였고, 조정의 결정에 불복한 상소나 정치적 파란을 야기하는 상소에 대해서는 소두 및 임원들을 직접 문초하거나 定配 또는 停擧처분을 내리기도 하였다. 물론 처벌을 하는 경우는 士氣를 꺾는다는 이유로 극도로 자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