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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의 내용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경상도 유생 유학幼學 이휘병李彙炳 등은 진정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려 백번 절하면서 주상전하에게 삼가 말씀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니, 저희들은 영남 산간벽지의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어리석고 천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성조聖朝의 크나큰 감화를 받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간헐적으로나마 선대의 올바른 가르침을 밝게 이어받아 백성으로서의 도리와 법도에 있어서도 어리석고 천하지 않습니다. 다만 혹 앞 뒤를 가리지 못하고 말하기는 합니다.

과거 임자년壬子年(1792년, 정조 16년) 영남사림이 상소를 가지고 임금 앞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정조대왕께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외모는 어리석고 천했지만 밤늦도록 바로 앞자리에서 뵈었습니다. 천 마디나 되는 말씀은 간절하면서도 정겨웠을 뿐만 아니라 칭찬도 참으로 지극했습니다. 이 때 말씀하시기를 “국가의 큰 의리에는 영남이 참여하여 도움 준적이 적지 않았다”라고 하셨고, “만여 명의 유생들이 주장한 내용을 통해 천하의 이치가 매우 공정하고 내게 부여된 짐이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도 하셨으며, 또 “서로 알려 경계하도록 하면서 의리의 넓고 밝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게 했으니, 이는 영남의 신하와 유생들의 공功이다”라고도 하셨습니다.

아! 당시 영남의 신하와 유생들은 바로 저희들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입니다. 저희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이 같은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면서 (그 뜻을)가슴에 품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오로지 “(의리를)널리 천명闡明할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말했고, 아들은 손자에게 또한 한결같이 “(의리를)널리 천명할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간담肝膽과 폐부肺腑에 새겨 입으로 읊조리며 마음으로 오로지 한 것 역시 “(의리를)널리 천명할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 같은 ‘(의리를)널리 천명할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가슴 속에만 쌓아두고 있었을 뿐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는데, 그것이 지금 60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결국 의리는 높이 들리어 밝혀지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저희들이 원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정조임금이 가르침에 큰 짐을 지고 있는 셈이지만, 저희들이 어찌 그것을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하늘이 이러한 일을 하도록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올해 을묘년乙卯年(철종 6년. 1855년)은 장헌세자께서 돌아가신지 120년 되는 해입니다. 생각해 보니, 성상聖上께서는 추모의 정성을 다해 존호尊號를 더해 올리시면서 정조대의 고사를 한 길로 준수하여 의식을 거행하시니, 전국의 모든 백성들이 무척 기뻐했습니다. 저희들도 그것을 계기로 경사스러운 모임을 갖고 선조께서 내리신 뜻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천리 길을 걸어 만인이 연명하여 간담을 도려내고 피를 쏟는 심정으로 대궐 앞에서 우러러 소리치게 되었던 것이니, 전하께서는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장헌세자께서는 영조임금께서 지니셨던 신성神聖의 자태를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효성과 우애의 덕까지 계승하여 밝고 깊은 학문을 일찍부터 습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로부터 높은 명예를 얻었습니다. 영조 임금님의 특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14년 동안 문안 드리고 음식을 살피면서 보인 정성과 효성은 신명神明에게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며, 군사들을 어루만지고 나라를 관리하면서 보이신 인자함과 명성은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서연書筵에서 어려운 것을 질문하며 강론한 것은 공자와 맹자에서 정자와 주자로 이어지는 학문이었고,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면서 모범을 삼은 것은 요순과 삼대三代의 정치였습니다. 삼종三宗(숙종·경종·영조)의 번성함을 이루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억조창생이 만수무강을 기원할 정도로 칭송을 받았지만, 보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혼령을 모신 사당의 위호位號(등급)도 세자의 원묘園廟에 해당하는 의례와 절목을 적용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더 이상 높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건대, 이것이 어찌 그 공로와 덕행을 보존하는 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원묘園廟와 사직社稷이 갖는 감화와 은택은 백성과 사물에 미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는 보위에 올랐는지 여부와 무관한 일로서, 조종祖宗의 공덕을 빛낼 수 있도록 의례를 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역대 왕들의 계보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세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가의 정사를 돌본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덕이 높고 넓은 것이 이와 같이 번성했던 때와 비교할 수 있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두 존호를 올렸지만 장헌세자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지극히 높이는 뜻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와 백성들이 애통해 하고 답답해 하는 마음에 국한되는 것이겠습니까? 생각건대 이는 국가 전례典禮의 부족하고 빠진 부분일 뿐만 아니라 제왕가의 추존追尊에 관한 전례가 존중되지 못하고 있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세자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에게 존호를 부여한 예로는 성종成宗임금께서 일찍 사망한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를 덕종德宗으로 추숭한 경우가 이미 있습니다. 하늘의 이치와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항시 지켜야 할 도리와 임시방편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절하게 참작하되, 이번과 같은 경사스러운 해를 맞아 특별히 존숭의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성인들이 늘 시의時宜에 맞는 제도를 찾아낸 것과도 부합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의 근본은 정리에서 연유하며 혹 거기에서 의리가 일어나곤 하지만, 혜택을 입은 자의 경우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經에서는 “선왕의 성헌成憲을 귀감으로 삼아라”고 말했고, 전傳에는 “효라는 것은 사람의 뜻을 잘 이어가는 것이면서 사람의 일을 잘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선대의 유학자들은 “요순임금을 모범으로 삼고자 하면 조종祖宗을 법도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선왕을 귀감으로 삼아 따라야 할 당연한 일은 성종임금이 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엎드려 볼 때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에게 존호를 추존하여 올릴 당시 윤음綸音에서 “제왕의 효도는 일반인과는 다르다. 반드시 존호를 쓴 깃발을 휘날리면서 높이는 일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조상의 은공에 보답할 수 있고 조상을 추숭하는 큰 절목이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계묘년癸卯年(정조7년, 1783년) 존호를 더하여 올릴 때 임금의 교칙에서 “생각건대 내가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고 조상을 헌창하는 뜻을 모두 펼 수 있는 곳이 없다. 작년 겨울 경연석에서 넌지시 말만 꺼내 놓고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진정 전례가 중요하지만 나 한 사람이 감히 경솔하게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억누르고 있자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유년己酉年(정조 13년, 1789년) 친히『현릉원지顯陵園誌』를 짓고는 “소자가 계승하기를 기다렸다가 중대한 일을 맡기게 되었으니, 드디어 그 뜻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빕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기 마련입니다. 소자는 그것을 기필코 이루어낼 수 있고자 합니다. 무릇 그렇게 한 뒤라야 비로소 영원할 수 있는 데다 천하 후세에 떳떳하게 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 뒤의 모든 말씀이 정녕 간절하면서도 진심을 다하는 것으로, 저희들은 세 차례나 반복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방법으로서 세상에 널리 떨치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자성慈聖(대왕대비인 純元王后)께 말씀드린 다음 신속하게 정해진 의식을 거행하여, 위로는 하늘을 오르내리는 선조의 영령들을 위로 하고 아래로는 효를 밝혀 무궁하게 할 것을 생각하십시오. 저희들이 또 엎드려 보건대 효의왕후孝懿王后(정조의 비)의 지문誌文에는 “왕(순조)께서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후비后妃에게 올리는 존호인 휘호徽號를 올리자 왕후께서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않으신 의도를 왕은 깊이 마음 속에 새기고 있어야 할 것이다. 미망인이 그것을 받는다면 어찌 선왕의 정밀한 의리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장헌세자의 존호 올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실로 선왕이 대단히 애통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호를 올리기 전에 혼자서 휘호를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이고, 그것이 또한 선왕의 정밀한 의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신만큼 반드시 미처 서두르지 못했던 전례를 먼저 거행하신 다음, 정조의 존호와 효의왕후孝懿王后 휘호를 추존해 올리는 절차를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하나의 부차적인 큰 의리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천지를 이룩할 때에 조금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귀신에게 응답할 때에는 추호도 의심나는 것이 없어야 백세를 기다리면서 의혹을 갖지 않게 되는 일도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 저희들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입니다. 어찌 감히 조정의 큰 전례에 대해서까지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염념천휘念念闡揮(의리를 널리 闡明할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라는 네 글자는 우리 선왕의 유교遺敎에 있는 말입니다. 저희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이러한 의리를 보았을 뿐입니다. 오직 전하께서 사리분별하지 못한 채 분수를 뛰어넘는 행위를 한 저희들을 용서하시면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희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직접 정조대왕의 성교聖敎를 받으셨지만 의리가 크게 밝아지는 것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무덤 속에서나마 이미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동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오늘 드린 말씀이 성상의 밝은 은혜를 입어 받아들여진다면 뒷날 무덤에 들어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을 만났을 때 우리 전하께서 뜻을 이어 일을 만들어 가시는 크고 훌륭한 덕이 일상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나온 것일 뿐이라는 칭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이 말할 수 있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오직 하늘에 기대고 성현들에 의지한 채 격정을 이기지 못해 갈팡질팡 하는 모습으로 지극히 삼가야 할 곳에서 죽을 줄도 모르고 말씀을 올립니다.

함풍咸豐 5년(철종 6년, 185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