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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가치

현대적 가치
만인소(운동)는 단순히 상소를 올리는 사람들이 만여 명에 달했다는 수치적 결과물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만인소는 조선시대 재야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공론 정치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비권력 집단인 재야 지식인들이 유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론을 모아 권력 집단을 견제했는데, 이러한 공론의 범위가 만 명이 상징하는 범위인 ‘모든 백성’의 개념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했다. 비권력 집단이 공론의 이름으로 국가 정책에 직접 참여했던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처럼 공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특히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만인소는 매우 중요한 현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공론이 공론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발성’에 기초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은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매우 중시했다. 만인소 운동이 시작되면 통지문과 회합 등을 통해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고, 여론을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의견이 모아지면 효율적 업무 수행을 위해 추천과 투표라는 절차를 밟아 상소의 대표자와 업무 담당자를 선출했다. 그리고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상소 초고를 받고 논의를 통해 최종 상소문을 완성했다. 이렇게 완성된 상소문에 대해 만인소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자필 서명과 수결을 함으로써 자발적 참여와 자기 책임성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만인소(운동)는 만여 명에 달하는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진행했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만인소의 가치는 그것이 만들어진 지역을 통해서도 중요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만인소는 <영남 만인소>로 불리기도 한다. 영남 지역이 만인소 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의미이다. 실제 7차례의 만인소 운동 가운데 1826년 서얼철폐를 청원했던 만인소를 제외하면, 6번은 모두 영남지역의 유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이유는 영남 지역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특징 때문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남 지역은 ‘자기 수양과 실천’을 특히 강조했던 한국적 유학의 발흥지이다. 이황(호는 退溪, 1501~1570)의 호를 딴 퇴계학의 모토는 ‘실천 유학’이었다. 이 지역 지식인들은 공부를 통한 출세보다, 자기 수양을 통한 인격의 완성을 더욱 강조했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18세기 이후 이 지역 지식인들은 중앙정계 진출을 하지 못했지만, 도덕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천 의지는 그 어느 지역보다 강했다. 이와 같은 실천 의지가 옳지 않은 정책 비판과 공론을 통한 정치 참여로 이어졌다. 만인소는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또한 만인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역시 현대적 입장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앞에서 충분하게 말했지만, 만인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유교 지식을 활용하여 출세 지향적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공간에서 가치 지향적 삶을 살았다. 특히 재야 유교 지식인들은 청원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로 진출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연명 운동을 진행했다. 1792년 최초의 상소에서 원래 성언집이 소두로 추대되었지만 관직에 있었던 경력으로 인해 다시 이우로 바꾼다. 만인소 운동이 혹여 정치적 의도나 당파적 이익으로 비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만인소는 도덕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재야 지식인들이 관료로 나아가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참여 방법이었다. 이들은 권력 쟁취에 욕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유교적 이념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청원 운동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인소는 개인의 욕망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이념적 기반 위에서 권력을 견제하고 올바르지 않은 정부 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