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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의 의의

만인소란?
만인소萬人疏는 말 그대로 ‘만명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이다. 만인소는 조선시대 만여 명에 달하는 재야 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왕에게 청원한 상소문을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상소 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여 명이 연명하여 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왕에게 올리기 과정에서 운동이 동반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만인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인소’는 좁은 의미에서 만명이 연명한 상소문을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만인소를 만들고 이를 올리기 위한 운동 전체를 지칭 한다.

만인소(운동)는 조선시대 독특한 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선비들의 공론에 의한 청원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던 정치문화와 이를 실천적 운동의 차원에서 진행했던 유학자들이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만인소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집중되는데, 이른바 ‘만여 명’이라고 하는 정도의 기준에 부합하는 상소 운동은 대략 7차례 정도 진행되었다.
이름 시기 소두 서명자수 상소내용 주도세력
사도세자
신원만인소
정조16
1792년
이우 (1차) 10,057
(2차) 10,368
사도세자를 신원시켜 달라는 상소 영남 유생
서얼차별
철폐만인소
순조23
1823년
김희용 9,996 서얼의 관직 임용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 전국유생
사도세자
추존만인소
철종6
1855년
이휘병 10,094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상소 영남 유생
서원훼철 반대
만인소
고종8
1871년
정민병 10,027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 영남 유생
대원군 봉환
만인소
고종12
1875년
(1차)정민채→이중진
(2차)류도수→이중진
확인 안됨 실각당한 대원군의 봉환을 요구하는 상소 영남유생
척사
만인소
고종17
1880년
(1차)이만손
(2차)김조영
(3차)김석규
확인 안됨 강력한 척사위정 정책의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 전국유생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고종21
1884년

이재교

8,849 고종 21년에 내려진 복제개혁 조치를 취소하라는 상소 영남유생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은 건국 이념인 유교에 따른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유교적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선비들의 존재를 매우 중시했다. 특히 권력을 지향하지 않고 자기 수양에 매진하는 ‘선비’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설정하고, 이들이 가진 공동의 생각은 유교적 이념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면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재야에 있으면 국가 권력이 유교적 이념에 따라 잘 운영되는지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 재야 유학자들은 유교적 이념에 비추어 옳지 않은 일이면 강력하게 의견을 개진했고, 국가 역시 이를 중요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 문화가 가장 직접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상소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비록 왕정王政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발달된 공론 정치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조선 초기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문화는 주로 개인의 청원이 중심이었지만,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집단 청원의 형태로 바뀌었다. 공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개별 청원운동보다는 집단 청원 운동이 효율적이었고, 이로 인해 연명 상소의 형태가 늘어났던 것이다. 만인소의 원형은 1565년 백 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22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린 <백인소百人疏>와 1666년 천 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연명한 <천인소千人疏>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던 19세기 만인소 운동은 중앙의 경직된 정치구조를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한 실천적 운동으로 이어졌다. 기존 청원 운동이 가장 역동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만인소 운동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일컬어질 만큼 엄혹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재야 지식인들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면서, 정부가 가진 유학적 이념을 회복하고 썩은 권력을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만인소 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민중봉기와 같은 극단적 방법을 선택할 때, 재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중앙정계에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늘의 뜻에 준하는 공론’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인 ‘만여 명’이 연명한 집단 상소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배경이다. 만인소(운동)는 ‘공론의 힘’이 개인에서 집단화 되는 것을 넘어, ‘모든 백성’의 뜻으로 형상화 해야 될 시기의 청원 운동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