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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 제작배경

임오화변壬午禍變
1792년 윤4월 27일 왕명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상소문 한 건이 제출되었다. 이 상소문은 이전에 올려 진 다른 상소문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려 10,057명에 달하는 영남 지방의 사림이 함께 올린 연명 상소였기 때문이다. 상소문의 내용도 정계에 큰 파장을 남겼다. 정조의 친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원하는 상소문이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11세가 되던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불리는데, 1792년 영남만인소가 올라가기 전까지 신하들뿐만 아니라 정조조차 함부로 거론할 수 없었던 민감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당사자가 국왕의 할아버지와 친아버지이며, 외가와 처가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신하들이 연루되어 있고, 무엇보다 왕통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영조대왕어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임오의리와 정조의 등극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나경언의 고변으로 폐서인 시켰던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주고, 직접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지만, 반대로 사도세자의 처분이 어쩔 수 없었다는 이른바 임오의리를 천명하였다.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세손인 정조를 어려서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세웠다. 그리고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임오화변을 일체 거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렇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신임을 얻은 채 1776년 즉위하였다. 그러나 임오화변은 집권 노론 세력을 시파時派와 벽파辟派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옥인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옥인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영남 남인의 재기와 영남만인소의 전개
그렇다면 왜 영남 지방에서 사도세자 신원과 관련된 상소문이 먼저 올라가게 되었을까? 이는 궁극적으로 1792년 윤4월 27일 영남 지방의 사림들이 만인소를 올린 것과 동일선상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당시 영남 지방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재기를 바라는 영남 남인들의 여망도 반영된 것이다. 남인은 갑술환국으로 실각하였고, 무신란으로 인해 그 근거지마저도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영남 남인들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함으로써, 정조의 신임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아가 사도세자 신원은 정조의 임오의리 재천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강경한 노론의 의리를 내세우며 타 당색을 기용하는 탕평책에 반대하고 있던 벽파 세력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즉, 영남 남인에게 사도세자 신원은 의리 문제를 넘어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기도 하였다. 이도현·이응원의 상소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영남 남인은 정조에게 사도세자 신원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각인 시킬 수 있었다. 이후 정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남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영남 지방에서는 서서히 만인소가 올려 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소행일록
1855년(철종 6)에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의 작성 전말과 상소를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소행일록(疏行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