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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역사적 배경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이라는 자가 사도세자를 고변하였다. 사도세자의 비행과 난행이 심할뿐더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분개한 영조는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그로 인해 윤5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차남이자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소생으로 1735년(영조 11) 출생하였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은 관계로 사도세자는 이듬해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에는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다. 사도세자의 성격과 정치적 판단력은 영조를 흡족 시키지 못했고, 그런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꾸지람과 조롱은 심해져 갔다. 대리청정은 오히려 세자로서의 신임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세자도 아버지 영조에게 불만을 품었고, 그것은 각종 비행과 난행으로 이어져 부자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졌다. 결국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나경언의 고변으로 폐서인 시켰던 세자의 위호를 회복 시켜주고 직접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지만, 반대로 사도세자의 처분이 어쩔 수 없었다는 이른바 ‘임오의리(壬午義理)’를 천명하였다.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세손인 정조를 어려서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세웠다. 그리고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임오화변을 일체 거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렇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신임을 얻은 채 1776년 즉위하였다. 그러나 임오화변은 집권 노론 세력을 시파와 벽파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임오화변 당시 할아버지 영조에게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그 이후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렸다. 무덤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였다. 무덤에 ‘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왕의 아버지만이 가능했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아들로서 그것을 풀어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또한 이 문제는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역적이라는 이유로 죽었기에 언젠가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왕통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은 아들로서, 그리고 왕통의 정통성 유지와 관련해서 숙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왕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견해는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또한 여기에는 탕평정치에 대한 입장과 견해 차이, 신료들, 특히 외척들 간의 정국 주도권 다툼과 같은 복잡다기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 사도세자를 신원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영조가 천명한 임오의리를 넘어서야만 했다. 정조는 궁극적으로 할아버지 영조가 세운 임오의리의 재천명을 도모하였다. 정조가 재천명하려는 임오의리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으나, 부자간의 성격 차이와 역적들의 이간책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신료들의 동의를 얻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명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임오의리의 재천명과 사도세자 신원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재야에 있던 영남의 사림들이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 신원을 먼저 거론하였다. 1776년 즉위 직후 안동의 사림 이응원(李應元)이 아버지 이도현(李道顯)의 지시를 받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관련자들의 처벌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도현·이응원에는 대역죄가 적용되어 바로 처형당하였고, 그들의 고향인 안동은 ‘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정조는 내심 사도세자의 신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즉위 직후였기 때문에 영조의 임오의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이 문제에 민감한 신료들이 정부에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도현·이응원 부자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당시 영남 지방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재기를 바라는 영남 남인들의 여망도 반영된 것이다. 영남 남인들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함으로써 정조의 신임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아가 사도세자 신원은 정조의 임오의리 재천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강경한 노론의 의리를 내세우며 타 당색을 기용하는 탕평책에 반대하고 있던 벽파 세력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즉, 영남 남인에게 사도세자 신원은 의리 문제를 넘어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기도 하였다. 이도현·이응원의 상소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영남 남인은 정조에게 사도세자 신원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각인 시킬 수 있었다. 이후 정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남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영남 지방에서는 만인소가 올려 질 수 있는 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어 갔다.

1788년(정조 12) 2월 정조는 세손 시절 자신을 보필했던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발탁하였다. 비록 채제공이 학문적으로 신망을 얻고 있다고는 하나, 그의 당색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노론 신료들의 강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인사를 강행하였다. 즉위 초반과 달리 정조는 재위 10년 차가 넘어가면서, 자신 주도의 정국을 꾸려나갈 만한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였기에 파격적 인사도 가능했던 것이다. 채제공은 한양과 그 인근에 세거하던 이른바 근기 남인으로서, 그의 우의정 발탁은 실각해 있던 영남 남인에게 재기의 희망을 주었다. 이후 같은 남인으로서 채제공과 영남 남인 간에는 지속적인 교감이 이루어졌는데, 우선적으로 반역의 고장이라는 인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정조와 채제공은 영남 남인을 끌어들이려고 구상하였다. 조덕린·황익재의 신원은 그 시작이었으며, 영남 남인에 대한 정조의 노골적인 배려는 1792년(정조 16) 3월에 취해졌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영남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만수는 왕명에 의거해 경주 옥산서원과 예안 도산서원에서 치제하였다. 두 서원은 각각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배향한 곳이었다. 거기다 도산서원에서는 별시를 거행하라고 지시하였다.

1792년(정조 16) 3월 25일 도산서원 앞에 과장이 열리니,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과 구경꾼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응시자만 7,228명이며, 거둔 시권은 3,632장이었다. 당시 정조는 치제와 별시의 명분으로서 “정학(正學)을 존숭하려면 마땅히 선현을 존숭해야 한다. 어제 옥산서원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옥산서원에 제사를 지내고 도산서원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사학(邪學)이 점차 번질 때에 오직 영남의 인사들이 선정(先正)의 학문을 지켜 흔들리지도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므로, 그 후부터 나의 앙모(仰慕)가 더해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천주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유학을 지켜온 영남의 유생들을 기특하게 여겨서 내려진 조처였다. 하지만 숙종대 이래로 소외되었던 영남 유생들에게 국왕이 직접 관심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의도가 컸다. 그리고 한달 여 뒤 정조의 숙원이었던 사도세자의 신원과 류성환·윤구종의 처벌을 요구하는 영남만인소가 승정원에 제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