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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의 참여 인물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의 참여 인물
1855년 1월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과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는 정조 이후 처음으로 장헌세자의 존호를 더하여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도산서원에서 유회(儒會)를 갖기로 제안하였다. 이에 도산서원에서는 두 서원에서의 발의에 동참하여 1855년 1월 27일에 사도세자의 신원과 추존 상소를 논의하는 모임을 갖기로 하고, 이를 안동부(安東府) 내에 통보하였다. 1월 27일 도산서원에 90여 명의 유생이 모인 가운데 상소의 소수로 소계(素溪) 이휘병(李彙炳)을 선발하였다. 이휘병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현감 이이순(李頤淳)의 아들이었으며, 동생 이만희(李晩憙)가 퇴계의 종손으로 입후되는 등 이휘병 일가는 당시 예안의 진성이씨 가문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날 향회(鄕會)에서는 안동 지역 유림들의 뜻을 영남 열읍에 알리고, 나아가 더 많은 공론을 모으기 위해 2월 20일 안동향교에서 도회(道會)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0일 도회는 이튿날인 21일 안동 강무당(講武堂)에서 200여 명의 유생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1855년 1월의 도산서원 향회에서는 사도세자의 추존에 대한 사안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전모를 밝혀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위한 임오의리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쟁점을 제기할 경우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장조 추상존호 옥책
장조 추상존호 옥책(1855)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철종 6년(1855) 1월 21일, 철종이 장조(莊祖, 1735~1762)에게 ‘찬원헌성 계상현희(贊元憲誠 啓祥顯熙)’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바친 옥책
실제 2월 20일 도회에서는 임오의리를 제기하는 중대한 사안을 1~2명이 발기하여 논의하는 것은 공의(公議)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다수 제기되었다. 또한 논의 과정에서 책임 문제를 다시 거론할 경우 의도와 달리 다른 사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쟁점에 연루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론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받아들여 각 진관의 열읍에서 더 많은 공론을 취합한 후 유소(儒疏)에 동참하는 소유(疏儒)들의 명첩(名帖)을 작성하여 3월 10일 상주향교에서 다시 도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상주 도회는 감영 향시(鄕試)로 인하여 날짜를 3월 25일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도산서원에서 제안하여 최종적으로 3월 15일 안동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3월 15일 안동 강무당에서 100여 명의 유생들이 모여 두 번째 도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부담으로 인하여 영남 유생들이 유소 참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대부분이 안동진(安東鎭) 관내 고을의 유생들만이 참석하였고, 다른 경주, 상주, 진주진관에서는 참석하지 않았다. 나아가 소유의 명함(名銜) 역시 안동진에서만 가져왔다. 이에 공사원 류정진(柳禎鎭)이 신해소록(辛亥疏錄)을 참고하여, 소록을 개정하자고 제안하였고, 이휘녕(李彙寧) 또한 각 읍의 소유를 대읍은 20인, 중읍은 7~8인, 소읍은 3~4인으로 신해 소록을 참고하여 더하거나, 수정하거나, 빼는 법식에 의거하여 파정(爬定)하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