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척사 만인소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세계 정세는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두 차례의 아편 전쟁을 거치며 청나라는 열강 앞의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하였다. 곧이어 일본도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동북아 질서는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한발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군림하기 위한 발판으로 1876년(고종 13)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이 구축해 놓은 세계질서에 강제로 편입되었고,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개항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서구 열강과 청나라는 동아시아에서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를 예의주시하였다. 그런 가운데 1879년(고종 16)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에게 편지를 보내 러시아의 침략을 방지하는 대책으로 영국·독일·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통상을 권유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함과 동시에 강화도조약에서 부정된 종주권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1880년 7월 조선 정부는 일본에 예조참의(禮曹參議)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을 필두로 제2차 수신사(修信使) 일행을 파견하였다. 조선 측은 강화도조약 후속 조치로 관세 개정, 미곡(米穀) 금수, 개항장 확대 문제 등 외교 통상에 대한 여러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다. 이러한 수신사 일행을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과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黄遵憲)이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다. 하여장은 7월 18일 김홍집 일행을 찾아가 근래 서양 각국의 외교 질서에 있어 ‘세력균형’이라는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였고, 7월 21일에는 러시아의 위협을 거론하며 미국과의 통상을 건의하였다. 8월 2일에는 황준헌이 귀국을 앞둔 김홍집을 방문해 작금의 외교 방략을 정리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건네주었다. 8월 3일 하여장은 김홍집과 작별 인사를 하며 『조선책략』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조선책략』의 핵심은 조선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 함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강(自强)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중국은 조선이 오래전부터 섬겨온 나라로 정의가 한 집안과 같고, 일본은 중국 다음으로 가까운 나라로서 러시아의 위협에 조선과 같은 운명이라고 했다. 미국은 서양 열강 중 다른 나라의 토지와 인민을 탐내거나 정사에도 간여하지 않으니, 러시아를 견제할 가장 믿을만한 강대국임을 강조하였다.
김홍집은 귀국 후 가져 온 『조선책략』과 청나라 외교관과의 필담을 고종에게 올렸다. 고종은 『조선책략』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9월 8일 여러 대신을 불러 이 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후 대신들은 고종의 명에 따라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의 사저에서 『조선책략』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대신들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고종의 재촉에 소극적으로 찬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미국과의 통상은 점차 현실화되어 갔으나, 공론을 배제한 통상 추진은 곧 커다란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유교 정치의 이상적 정치 과정 중 하나가 공론 정치이다. 조선 초 공론의 주체는 중앙의 관료 집단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림파(士林派)가 성장하면서 성균관 유생(儒生)을 포함한 지방 유림들도 공론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에 유림들은 상소·상언을 통하여 국정 현안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이해를 관철시키려 했다. 국왕 역시 어떠한 국가 대소사를 결정하는데 공론을 토대로 추진하였다. 공론은 정책 추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된 것이다.
조선 정부가 추진한 미국과의 통상은 이러한 유림의 공론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 이미 유림 세력은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강력하게 피력한 적이 있었다. 또한 재야 유림들은 아직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간의 첨예한 이해관계를 냉철히 분석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과의 통상 추진이 초래할 유림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되었음에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설득이나 공론의 수렴 과정을 배제한 채 『조선책략』을 바탕으로 통상을 추진하였다. 통상 추진 소식은 곧 지방 유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위정척사’를 대의명분으로 삼고 있던 유림에게 미국과의 통상은 오랑캐에 대한 굴복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유림들은 반발하였고 상소를 통해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그런 가운데 영남에서는 집단적 움직임이 포착되는데, 바로 만인소(萬人疏)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