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관련 자료
조정에서 류성한의 상소로 그의 처벌을 상신하는 글들이 이어지자, 성균관에서도 윤4월 2일 유생들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 연명소에서 성균관 내 영남 유생들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날 성균관에 머물던 영남의 유생들은 사령 이세윤(李世胤)의 사관(舍館)에서 모여 당시의 정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사도세자의 사망 이후 두려워서 감히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으니 근본을 찢어발겨 함께 극구 말하자고 의기투합하였다. 윤4월 4일에 이헌유(李憲儒)의 사관에서 다시 모여 이전의 의론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헌유는 김한동에게 편지로 이 일에 힘써주길 말하자고 했고, 권방은 편지도 하고 통문도 발송하면 사문의 소식을 듣고 즉시 거행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통문을 보내고, 윤4월 6일에는 귀향하는 참봉 박한동 편으로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도 통문을 보내었다. 김한동(金翰東)은 4월 28일 수찬으로 임명되고서는 안동에서 처음 왕명을 기별받았을 때 대략적인 류성한의 상소를 보았다. 이에 분연히 사람들에게 사도세자 사후 30년간 응집된 의리를 이번 기회에 밝히기 위해서 온 도내의 진신(搢紳)들이 일어나 성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재종질 김희택(金熙澤)도 의리에 있어서 장보(章甫)들도 사양하지 않고 함께 동참해야 한다고 호응했다. 이런 가운데 윤4월 8일 삼계서원으로 성균관 내 영유(嶺儒)들의 편지와 통문이 도착하였는데, 김한동과 같은 의견이었다. 즉 류성한의 상소로 대신과 삼사가 연이어 장계를 올리고, 성균관의 진신소도 올라가는 때에 영남의 진신장보도 상소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니 동참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윤4월 20일 이내에 영남의 소유(疏儒)들이 출발하여 올라오면 함께 상소를 올리자고 했다.
다음날 일찍 삼계서원 산장 주부 김희성(金熙成)과 시독(侍讀) 김한동은 서원으로 급히 나아가 안동의 사우(士友)와 인근의 영천(榮川)·순흥(順興)·봉화(奉化)에 두루 알렸다. 10일에는 삼계서원 관물루(觀物樓)에서 유신(儒紳) 70여 인이 모여서 공사원과 소임(疏任)을 선발하였다. 소수(疏首)는 중요하기에 반유(泮儒)들과 상의해야 하므로 임시로 천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류성한의 일로 상소를 하는 것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가운데 임원을 선발하였음을 알렸다. 아울러 화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상주 도남서원, 예안 도산서원(陶山書院),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에 통문을 보내고 윤4월 17일에 출발하여 충주에서 20일에 재회하는 것으로 약속하였다.
12일에 국왕의 소명을 받은 김한동과 김희직(金熙稷)이 먼저 출발했다. 그러나 김희직은 중도에 병이나 단양에서 사직소를 올리며 류성한의 죄를 성토하였다. 13일에는 도산서원 유생이 명첩(名帖)과 소자(疏資) 30냥을 보내오고, 봉화에서도 답통과 소자 5냥을 보내왔다. 영천(榮川)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서도 소자를 변통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16일에는 예안의 유학 김시찬(金是瓚)·생원 이태순(李泰淳), 영천의 유생 김종화(金宗華)가 삼계서원에 모였다. 그리고 산장과 사림 10여 인이 소유들을 송별하기 위해 모였다. 이날 안동 도연서원(陶淵書院)과 묵계서원(黙溪書院), 순흥 단계서원(丹溪書院)에서 명첩과 소자를 보내왔다. 배소유생이었던 권사호가 다리에 병이 나서 그의 아들인 생원 권의도(權義度)가 왔다. 또한 일기유사로 이태순과 권의도를 선발했다.
18일에는 김희택과 생원 김희주가 삼계서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송정(松亭)에 이르자, 안동의 진사 김갑동(金甲東)과 수찬 김희직 및 수십 인이 송별하였다. 오후에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쉬고, 저녁 무렵 풍기향교에 도착하였다. 진사 류회문이 사빈(泗濱)·호계·구계서원(龜溪書院)의 명첩과 소자 25냥을 가지고 17일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전지평 성언즙(成彦檝)과 유학 이우·박한사(朴漢師)·성종로(成宗魯)·이검행(李儉行) 또한 먼저 도착하였는데, 영천(榮川)의 명첩과 소자 15냥, 노림서원(魯林書院)의 명첩과 소자 5냥을 가져왔다. 안동의 유학 황최원(黃最源)·황사원(黃泗源) 등 10여 인이 와서 명첩과 소자를 내었다. 순흥 단계서원의 원장 황사한(黃師漢)이 술과 안주를 소유들에게 제공하였다.
19일에 성언즙을 선두로 12인이 동행하여 고개를 넘어 장림역(長林驛)[단양군 대강면 장림리]에서 쉬고, 저녁 무렵 장회(長會)나루에서 묵었다. 20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여 황강역(黃江驛)에서 식사를 하고 충주에 이르러 안반천(安盤川)에서 묵었다. 이날 윤구종이 폐사(斃死)한 소식을 듣고 그의 죄상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21일에는 남정(柟亭)을 출발하여 해가 저물기 전에 장현(長峴)의 도주(島舟)에 이르렀다. 진사 최봉우·진사 정필규가 각자 명첩과 소자 10냥을 가지고 추가로 도착하고, 좌윤 김몽화(金夢華)의 서신도 도착하였다. 22일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비바람을 맞으며 이천(利川)을 거쳐, 광현(廣峴)[넉고개]을 넘어서 경안(景安)[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에 이르러 머물렀다.
23일에 가촌(加村)을 출발하여 오후에 소유들이 나란히 한양에 입성하였다. 상주의 소유 이경유(李敬儒), 지평 강세응(姜世鷹), 장령 강세륜(姜世綸), 유학 강세로(姜世魯)는 22일에 입성해 있었다. 이우와 장령 남필석(南必錫), 유학 김종범(金宗範)·조거신(趙居信)·이여간(李汝幹)·류태조(柳台祚)·김종호(金宗鎬) 등이 추가로 도착하여 선후로 도착한 이들이 30여 인이었다. 이들은 교리 김한동의 사관(舍館)에서 성균관 유생인 봉사 류규, 감찰 권방, 전적 이기정과 회의를 하였다.
24일 사현사(四賢祠)에서 소회(疏會)를 개최하였다. 공사원에 감찰 권방과 유학 강세로를 정하고, 진신소수(搢紳疏首)로 수망(首望)에 지평 성언즙과 부망(副望)에 장령 남필석, 말망(末望)에 수찬 김한동이 천거되었다. 성언즙과 김한동이 동점이었기에 유생 류회문이 수망인 성언즙을 소수로 진청하였다. 이어서 소임을 배정하였는데 도청에는 전군수 이헌유·진사 최봉우, 장의에 지평 강세응·전적 이기정이었다. 또한 이틀 후 복합(伏閤)하기로 결정하고 소록(疏錄)을 베끼는 일은 조거신·이여한·이태순·김희주·류회문·김종호·류태조에게 맡겼다. 이날 유학 이존덕(李存德)과 이은유(李殷儒)가 문안을 왔다.
25일에 영천(永川)유생 이동겸(李東謙)이 영천의 명첩을 가져왔다. 소유들이 소청에 모여서 다음날 상소하기로 하고, 소록을 베끼는 유생 각자가 열읍의 명첩을 분배하여 밤을 새워 작업을 했다. 또한 영천(榮川)의 김총관(金摠管)이 낸 부전(賦錢) 39냥과 선혜청에서 빌린 50냥을 합쳐서 소지값(疏紙賈)[10권, 25냥]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소유들의 유자(留資)로 나누어 주었다. 이헌유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위무하였는데, 이날 재유(齋儒) 진사 류광진(柳光鎭)·진사 신석상(申奭相)·진사 홍낙문(洪樂文)·진사 장석춘(蔣錫春)·진사 홍낙현(洪樂玄)·진사 신구(申榘), 한석민(韓錫敏), 용담현령(龍潭縣令) 심규(沈逵), 진사 최묵(崔黙), 최홍진(崔鴻晉), 김만진(金冕鎭), 직강 정형신(鄭衡臣) 등이 문안을 왔다. 한편 왕명으로 진신의 연명소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진신소수 성언즙이 장보로 소수를 바꾸길 거듭 요청하였다.
이에 26일 아침에 소청에 모여 공사원으로 박한사(朴漢師)와 김희택(金熙澤)을 정하고, 소수로 수망에 이우, 부망에 이경유, 말망에 김시찬이 천거되었는데 이우가 다수의 선택을 받아 소수로 선출되었다. 소임도 장보 가운데 선발하여 다시 고쳐 기록하였다. 이날 삼계서원 원예(院隸)가 산장 전주부 김희성의 편지와 의성·영해·진보·경주·흥해의 통문과 명첩을 붙여서 도청으로 가져오고, 진사 권철(權澈)이 문안을 왔다.
해가 저물 무렵 반재(泮齋)로 근실(謹悉)문자를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었다. 그러나 영남 유소의 소수가 장보이므로 태학의 근실이 불가하다고 했다. 당시 유림들의 상소는 ‘근실’이라고 하여 성균관 재임들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왕명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제출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무분별한 상소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반대파의 여론을 막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성균관 재임들이 노론 일색이었던 관계로 상소문은 성균관의 ‘근실’을 받지 못하였다.
성균관의 근실을 받지 못한 영남의 소유들은 27일 진시(辰時)[오전 7~9시]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소수 이우를 비롯한 진신 유생 11인과 장보유생 25인이 10,057인의 명첩과 상소를 배소하여 복합하였다. 진신유생들이 그 소개(疏槪)를 수문장에게 전달하였지만 성균관의 근실이 없다는 이유로 봉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소수 이우는 역적을 성토하는 중요한 알을 막는 것은 상례에 어긋나는 것이며, 진신장보 유생 만여 명의 연명소는 사리와 체면이 매우 중대하므로 이를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수문장이 여전히 막자 진신유생들이 승정원에 말을 전하였다. 하지만 승정원의 답변도 수문장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수문장이 소개를 봉입하더라도 승정원에서 이를 막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리 김한동을 소수로 장령 남필석·강세륜, 지평 성언즙·강세응 등이 연명하여, 근실이 필요 없는 진신소(搢紳疏)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승정원에서는 진신의 합소(合疏)는 조정에서 금지하므로 봉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결과 전 수찬 김한동이 홀로 짧은 글의 상소를 제출하였다. 그는 전직 관원이었기에 진신소로서 근실이 필요 없었고, 연명소도 아니었기에 어전에 봉입될 수 있었다. 김한동은 상소에서 정조에게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萬人疏)가 각 처에서 저지당해 봉입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뢰었다. 상소를 접한 정조는 즉시 만인소의 봉입을 지시하고, 파격적으로 소수 이우와 진신장보의 소임들을 직접 접견하였다. 이들은 전교리 김한동, 전장령 강세륜, 전지평 성언즙, 전군수 이헌유, 유생 김희택·김경유·김시찬(金是瓚) 등이었는데, 이들의 성관과 족벌을 물어보고 이우로 하여금 전(殿)에 올라 상소를 읽게 할 때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겨우 진정하여 소임들을 모두 전에 오르도록 하고서 차분하고 자상한 어조로 이른바 ‘의리(義理)’문제에 대해 언급한 다음 승지 임제원(林濟遠)에게 비답을 쓰게 하였다.
영소전말(嶺疏顚末)
미상 / 18세기말~19세기초 / 필사본, 25.0×14.2cm / 의성김씨 벽계고택
영남 최초의 만인소인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전말을 기록한 책. 상소의 발단과 전개과정, 그리고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동향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필사본 『천휘록』 등 여러 자료와 함께 간행본 『천휘록』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천휘록(闡揮錄)
미상 / 1933년 / 신연활자본, 29.0×20.0cm/ 고성이씨 탑동종가
필사본 천휘록을 재정리해서 연활자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1933년 간행하였다.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의 내용이다. 필사본과 약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여러 인물들이 기록하였던 자료들을 종합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소청일록략(疏廳日錄略)
질암(質菴) 최벽(崔璧) / 1792년 / 필사본, 22.5×20.0cm / 경주최씨 질암종중
1792년 사도세자 신원만인소의 소청일록이다. 작성자는 질암(質菴) 최벽(崔璧)이다. 1792년 만인소의 대표적인 상소일기인 천휘록과는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대천록(待闡錄)
박하원·박제대 / 1934년 / 신연활자본, 26.0×18.4cm / 청도밀양박씨 병재문중 형재문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대의 정치적 동향 및 영남만인소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유성한, 윤구종사건을 기술하였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으로 본편은 임자의리소에 참여하였던 박하원(朴夏源)이 서술한 것이며, 보편은 증손 박제대(朴齊大)가 서술한 것이다. 1934년 연활자로 간행되었다. 야승류로 조선말기 유행하였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 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이다. 시파(時派)의 입장에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당론서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