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대원군 봉환 만인소의 관련 자료
대원군 봉환을 요청하는 상소 운동이 본격화하였을 때는 1874년(고종 11) 10월 25일 안동의 숭보당(崇報堂)에서 도회(道會)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숭보당 도회에는 250여 명의 유생이 모여 상주의 정민채(鄭民采)를 소수(疏首)로 선출하고, 11월 20일 문경 유곡에서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발행하기도 전에 소수와 안동의 이중린(李中麟) 등이 안동부에 구금되었다. 이에 유생들은 다시 이중진(李中振)을 소수로 뽑아 상소 운동을 추진하였다. 12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소유들은 봉환 요청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가 사퇴한 이중진을 대신하여 류도수(柳道洙)를 소수로 뽑아 1875년(고종 12) 3월 3일 복합(伏閤)이 시작되어 5일에 봉입이 되었다. 그러나 곧 소수 등을 길주·갑산 등지에 유배하라는 처분이 내렸다. 이후 2차, 3차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봉소(奉疏)하기도 전에 역시 유배 처분이 내려졌다. 4차 상소에서는 영남 유생뿐만 아니라 호남, 관서, 황해 유생 등이 가담함으로써 5도 유생 1,000여 명이 복합에 들어갔다. 이후 전라도, 함경도 유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소유들의 복합은 6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유생들의 복합이 계속되자 고종은 마침내 소수들을 하옥하고, 곧 처참할 것을 명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22일 밤 대원군이 스스로 돌아옴으로써 소수들은 가까스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봉청대원위환차소(奉請大院位還次疏)
류도수 / 1875년(고종 12) / 필사본, 20.0×68.5cm / 풍산김씨 영감댁
대원군 이하응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로, 만인소로 올려졌다. 류도수가 소수(疏首)로 활동했으며, 조선말 청의 조선정치 개입에 대하여 반박하는 내용으로 당시 상소에 참여했던 류도수와 이학수, 이상철, 서승열 등의 귀양처까지 적었다. 상소의 원본은 아니며, 필사본이다. 권정호가 소수 류도수에게 보낸 편지와 이붕순의 상소를 첨부하여 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