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추상존호 옥책(1855)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철종 6년(1855) 1월 21일, 철종이 장조(莊祖, 1735~1762)에게 ‘찬원헌성 계상현희(贊元憲誠 啓祥顯熙)’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바친 옥책
이휘병(李彙炳)을 대표로 하는 10,094명의 영남 지역 유학 지식인들 / 1855년 / 한지, 세로 111.0×가로 9,650.0cm의 상소 / 도산서원운영위원회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1792년 만인소에 대한 정조의 약속 이행을 요구한 상소문, 10,094명의 연명 및 수결
미상 / 미상 / 27.7×44.0cm / 풍산김씨 영감댁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의 발단이 된 류치명의 상소와 대사간 박래만의 상소, 우의정 조두순의 차자와 비답을 필사한 것이다. 이 상소들이 제척(除斥)되자 영남에서 본격적으로 1855년 영남만인소가 결정되고, 봉납되었다.
미상 / 1849년 / 25.0×36.0cm / 풍산류씨 화경당
1855년 사도세자 추존만인소를 올리기 위하여 돌린 통문이다. 이 통문을 돌리고 난 다음 소청을 설치하고 상소를 조직하였다. 통문을 돌리는 주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미상 / 1851년 / 89.5×66.0cm / 풍산류씨 화경당
1855년 사도세자 추존만인소와 관련된 통문이다. 1851년 발행된 것으로 2월 10일 향회, 22일 도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날짜가 너무 촉박하므로 22일 향회를 열 것이니 참석을 하라는 요청이다. 상소의 준비과정에서 치밀한 조율이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휘준 / 1855년 / 필사본, 30.5×19.0cm / 진성이씨 향산고택
1855년 2차 사도세자 만인소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앞에는 서준보, 류치명, 박동만 등의 상소와 차자를 실었고, 뒷부분은 상소일기이다. 사도세자 추존만인소의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작성자는 이가순의 아들 복재(復齋) 이휘준(李彙濬)으로 판단된다.
김영락 / 1855년 / 필사본, 28.7×18.0cm / 안동김씨 삼소재종가
1855년 사도세자 추존만인소의 상소일기이다 앞부분에 서준보, 권재대, 류치명 등의 상소를 수록하였고, 뒤에 일기를 수록하였다. 일기 뒤에 유소에 참여하였던 소임유생들의 명단을 수록하여 참여자들을 알 수 있다. 당시 한양에 입성하고 난 다음 소청을 방문하였던 인사들의 명단도 수록하여 참여규모를 알 수 있다. 삼소재 가문의 김영락에는 ⊙표를 하여 이 가문의 인사가 참여하였음을 표시하였다. 김영락이 원본 상소일기를 필사하고,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추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오화변 당시 호당과 역당을 구별하여 성명을 적시하여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미상 / 1855년 / 필사본, 22.5×20.0cm / 경주최씨 질암종중
1855년 1월 26일부터 5월 16일까지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소청을 설치하고 상소문 작성 등 경과를 기록한 것이다. 상소를 올리기 위해 유생들이 임시로 특정 장소에 소청을 설치하고, 소청의 장을 뽑고, 상소문 초고를 작성하고, 그것을 교열하는 과정을 거쳐 상소문이 완성되어 상소문을 올리러 간 일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상소의 내용은 이휘병(李彙炳)을 소수로 하여 장헌세자(莊憲世子: 사도세자)의 참사가 있은 지 120년이 지나도록 신원(伸冤)하지 못했다하여 추존(追尊)을 요청하는 것이다. 일기의 처음에는 소청에 참여한 유생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강주영(姜冑永), 노성순(盧性純), 조현기(趙鉉基), 강운흠(姜運欽), 여사철(呂思哲) 등이다.
미상 / 1855년 / 필사본, 25.0×24.0cm / 나주정씨 호암종택
1855년 사도세자 추존만인소의 상소일기이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형식으로 보인다. 아직 정서하기 전의 형태이다. 문경에 소청을 설치하게 된 배경과 서준보, 류치명의 상소를 실었고, 별지로 방문록이 있다. 최초의 작성본으로 판단된다.